여유롭고 행복한 하루

시 소설 행간 모음 147

갈대 / 신경림

갈대 신경림 언제부터인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그는 몰랐다. ##### 신경림 시인의 「갈대」를 만나본다. 수더분한 잿빛의 머리를 풀고 강가나 들판에서 끊임없이 바람에 흔들리는, 그러다 가을도 끝나가고 겨울이 되면 그 풍성한 머리칼도 다 날아가고 앙상한 뼈마디의 손가락들만 저 칼칼한 푸른 하늘에 손을 흔들고 있는 갈대. 신경림 시인은 이 갈대를 소재로 우리네 삶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사라지지 않을 한 편의 외로움의 시편을 엮었습니다. 시란 시인이 어떤 소재를 가지고 ..

풀 / 김수영

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김수영 (1921~1968) 시인. 서울 출생. 1947년 “예술부락”에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초기에는 모더니즘 성향을 강하게 드러냈으나, 점차로 강렬한 현실 의식과 저항 정신에 기초한 새로운 시정(詩情)을 탐구하였다. 시집으로 “달나라의 장난”(1959), “거대한 뿌리”(1974) 등이 있다...

풍경 달다 / 정호승

풍경 달다 정호승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 시의 매력은 함축과 생략과 상상에 있음을 이 시를 통해 또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정호승 시인의 ‘풍결 달다’라는 시가 가지는 이러한 매력은 또한 짧은 몇 행이지만 하고자 하는 의미를 다 담아내고 있는 점에 있기도 합니다. 시인은 전라남도 화순 운주사에 있는 와불을 시의 첫머리에 끌어들여 호기심과 주제를 향한 시의 문을 엽니다. 와불은 누워있는 불상인데, 좌불이나 입상의 불상과는 또 다른 특이한 인상을 남깁니다. 가장 편안한 자세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누워있다는 것에서 움직이지 않고 정체된 어떤 존재의 모습을 지니고 ..

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 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 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운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

가을이 되면 ...오광수

가을이 되면 오광수 가을이 되면 훨훨 그냥 떠나고 싶습니다. 누가 기다리지 않더라도 파란 하늘에 저절로 마음이 열리고 울긋불긋 산 모양이 전혀 낯설지 않는 그런 곳이면 좋습니다. ​ 가다가 가다가 목이 마르면 노루 한 마리 목 추기고 지나갔을 옹달샘 한 모금 마시고 망개열매 빨갛게 익어가는 숲길에 않아 이름 모를 새들의 노래 들으며 반쯤은 졸아도 좋을 것을. ​ 억새 꺾어 입에 물고 하늘을 보면 짖궂은 하얀 구름이 그냥 가질 않고 지난날 그리움들을 그리면서 숨어있던 바람 불러 향기 만들면 코스모스는 그녀의 미소가 될 겁니다. ​ 가을이 되면 텅 비어있던 가슴 한쪽이 문을 열고 나 혼자의 오랜 그리움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기다림이 되어 그렇게 그렇게 어디론가 훨훨 떠나고 싶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 정호승

내가 사랑하는 사람 / 정호승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 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