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롭고 행복한 하루

시 소설 행간 모음

<행간 보기>소금 -박범신

전승기 2014. 10. 30. 14:47

 

 

소금 ---박범신

 2014. 10. 30.

 

<소금>은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화해가 아니라 가족을 버리고 끝내 <가출하는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소설 속에는 다양한 모습의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모습은 제각각이지만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견디는,

하지만 가정에서 소외되는 아버지의 모습들은 하나로 겹쳐집니다.

그리고 다시 현실 속 우리 아버지의 모습과 오버랩됩니다.

그래서 소설은 더욱 가습 아픕니다.

작가는 아버지의 이야기와 함께 자본주의의 폭력성에 대해서도 이야기 합니다.

자본이 가족의 해체를 부채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행간을 들여다 봅니다...... 

 

<p15>

“햇빛이 죽인 거지. 소금이 죽인 거지! 그래도 모르겠어요?

소금을 만드는 양반들이, 참 뭘 모르네. 안 먹고 땀만 많이 흘리면 몸속의 소금기가 속속 빠져 달아나요. 이 양반, 몸속 염분이 부족해서 실신해 쓰러졌던 거예요. 만들기만 하면 뭐해요. 자기 몸속의 소금은 챙기지도 못하면서!”

 

 

<p47>

아버지는 그럼 건강했던가. 그런 질문은 한 번도 해본 일이 없다. 아버지와 병원은 당연히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왜냐고 물으면 그녀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을 것이다.

“아빠잖아!”

아버지는 환자가 될 수 있는 권리도 없다, 라고 그녀들은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p70>

마지막 노래는 제목이 <아버지>엿다.

 

“아버지 오신다 저기 소금밭에 오신다

햇빛도 좋고 바람도 좋구나

아버지 오신다 저기 콩밭 두렁에 오신다

하늘도 푸르고 땅도 푸르구나

소금밭을 밟으면 소금이 오고

콩밭을 밟으면 콩 낱이 온다

아버지 오시는 길 햇빛 같은 길

아버지 가시는 길 눈물 같은 길.”

  

<p133>

"소금은, 모든 맛을 다 갖고 있다네. 단맛, 신맛, 쓴맛, 짠맛. 단것. 신것에 소금을 치면 더 달고 더 시어져...뿐인가. 염도가 적당할 때 거둔 소금은 부드러운 짠 맛이 나지만 32도가 넘으면 쓴맛이 강해. 세상의 모든 소금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맛이 달라. 소금에 포함된 미네랄이나 아미노산 같은 것이 만들어내는 조화야....

사람들은 단맛에 일반적으로 위로와 사랑을 느껴. 가볍지. 그에 비해 신맛은 나에게 시비를 거는 것 같고, 짠 맛은 뭐라고 할까. 옹골찬 균형이 떠올라. 내 느낌이 그렇다는 거야. 쓴맛은 그럼 뭐냐. 쓴 맛은 어둠이라고 할 수 있겠지.

.....소금은, 인생의 맛일세! ”

 

 

 

<p254>

누가 인생에 대해 묻는다면 그는 말할 참이었다.

"인생엔 두 개의 단 맛이 있어. 하나의 단맛은 자본주의적 세계가 퍼트린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에서 빨대로 빠는 소비의 단맛이고, 다른 하나는 참된 자유를 얻어 몸과 영혼으로 느끼는 해방감의 단맛이야.”

그가 얻은 결론 그랬다.

 

 

 

<p331>

'핏줄'이라는 이름으로 된 빨대는 늘 면죄부를 얻었다.

사람들은 핏줄, 핏줄이라고 말하면서 '핏줄'에서 감동받도록 교육되었다. 핏줄조차 이미 단맛의 빨대들로 맺어져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불렀다. 사랑이 빨대로 둔갑했지만 핏줄이기 때문에 그냥 사랑인 줄만 알았다. 빨대를 들고 기웃거리는 젊은이들은 어디에서든 볼 수 있었다. 일차적인 표적은 아버지였다. 스물이 넘은 자식들조차 핏줄이므로 늙어가는 아비에게 빨대를 꽂아도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다. 모두 그 체제가 만든 덫이었다.

 

 

 

<p333>

......아버지들은 근엄했지만 아무 힘이 없었다.

체제에 편입돼 과실을 따오는 대표 선수로서 그럴듯해 보이긴 했지만, 가족들이 거대한 소비 체제에 들어 있는 한 아버지에겐 그 체제를 방어할 항거 능력이 전무했다. 핏줄에게 빨리고 핏줄의, 핏줄의, 핏줄에게도 빨렸다. 핏줄이라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명분으로 삼은 저들이 자신들의 깔때기를 채우기 위해 그 구조를 전적으로 허락하고 돕기 때문이었다. 성장한 자식을 독립시키겠다고 해도, 핏줄이므로 아버지만이 비난받는 이 구조는, 체제의 입장에선 양보할 수 없는 규범이었다 ..

 

 

 

<p354>

생산성을 전제로 한 목표치가 그 라인에 주어져. 그때부터 모든 조직원이 장애물 경기 선수가 되지. 이루기도 어렵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하지도 않은 아슬아슬한 수준에 목표치가 정해지거든. 운동회 때의 과자 따먹기 놀이하고 비슷해. 까치발을 하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핏대를 세우면서 목줄기를 죽어라 세우는. 꽁무니에 불을 붙여놓고 달리는 느낌이지. 앗, 뜨거!. 았 뜨거! 하고 종대로 달려.....

 

 

<p365>

자본주의는 '빨대'와 '깔때기'의 거대한 네트워크라 할 만하다. 내 가슴에 가장 깊이 새겨진 이미지는 빨대와 깔때기의 구조 안에 살면서도 '첫 마음'을 오롯이 지켜온 '세희 누나'의 모습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