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롭고 행복한 하루

시 소설 행간 모음

시 암송 <94> 행복 / 유치환

전승기 2026. 3. 18. 18:32

제주도 종달리 해변. 20260315


절제된 사랑 속에서 느끼는 조용한 만족과 체념이
섞인 감정을 담고 있는 시.


시 암송 ~~  " 아흔 네번째 "
유치환 님의  " 행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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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    유치환 (1908 ~ 1967)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 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느낌 한마디 ■

♤유치환의 "행복"은 소박한 일상 속에서 느끼는
감정을 담담하게 풀어낸 시이지만, 이영도와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이야기를 떠올리며 읽으면
더욱 깊은 울림을 준다.

이 시에서 말하는 행복은 크고 화려한 것이 아니라,
조용히 마음속에 머무는 작은 감정이다.
특히 사랑을 온전히 이루지 못한 상황에서도
그 감정을 억지로 밀어내지 않고, 있는 그대로
간직하는 태도가 인상적이다.
이는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감정을 소중히 여기는 성숙한 자세로 느껴진다.


♤유치환의 "행복"은 사랑의 성취를 말하지 않는다.
대신 사랑의 태도를 말한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라는 문장은 선언에 가깝다.
이 시에서 사랑은 결과가 아니라 선택이며,
보상이 아니라 이미 완결된 감정이다.

시 속 화자는 우체국 창가에 서 있다.
우체국은 수많은 사연이 오가는 공간이지만,
화자의 시선은 오직 '너'에게 쓰는 편지에 머문다.
세상의 고단한 이야기들이 분주히 오가는데도,
사랑은 소란 속에서 더 고요해진다.
이 장면은 사랑이 얼마나 개인적이고, 또 얼마나
집중된 행위인지를 보여준다.

"진홍빛 양귀비"라는 비유는 특히 인상적이다.
양귀비는 아름답지만 오래 머물지 않는다.
유치환은 사랑을 영원한 약속으로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라질 수 있음을 이미 알고 있는 감정,
그래서 더 애틋한 감정으로 그린다.
이 시의 사랑은 붙잡는 것이 아니라 기억될 준비가
된 사랑이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이별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라는 문장에는 체념이 아니라 확신이 있다.
사랑했기 때문에, 더 바랄 것이 없다는 확신이다.
여기서 행복은 지속의 결과가 아니라, 사랑했다는
사실 자체에서 완성된 상태로 남는다.

"행복"은 우리에게 묻는다. 사랑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랑을 받기를 기다리고 있는가.

유치환은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답한다.
사랑은 주는 순간 이미 행복이 된다고....

(참고 : 뉴데일리, 김상진 기자의 서평 talk)


☆시와 관련된 일화

통영여중 재직 당시 가정교사로 일했던 시인 이영도에게 반해 20년 동안 연애편지를 써서 보냈다. 처음 만난 1947년부터 교통사고로 사망한 1967년까지 이룰 수 없는 짝사랑에 대한 고통과 회한, 그리고 설렘과 기쁨을 잔뜩 버무려 표현한 연애편지들 가운데 6.25 전쟁 이전의 것은 소실되고 남아 있던 것이 5천여 통이라 한다. 그 중 200통을 추려 유치환이 죽고 나서 두 달 후에 《사랑했으므로 幸福하였네라》(중앙출판공사, 1967) 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는데,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부수인 2만 5천 부를 찍어냈다.

문제는 그가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이었다는 점. 반면 이영도는 21세에 남편을 잃고 외동딸을 홀로 키우던 과부였다. 다만, 두 사람은 현실의 만남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유치환 아내(권재순)는
이 이야기가 퍼졌는데도, 20년 동안 꾹 참았다는 것이다. 참고로 이영도는 위에 나온 책 판매수익을 모두 기부했다.
(다음백과 참조)

♤위 시를 받은 이영도 시인은 아래의 답 시를 보낸다. 시인들의 사랑이라 그런지 시로 얘기하고 시로 답하는 상황이 눈에 선하면서도 그때 그분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무제 1     /  이영도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窓)만 바라다가
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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