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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남원 광한루의 늦여름 풍경

전승기 2020. 9. 8. 09:27

전북 남원 광한루

 

 

코로나19로 외출하기가 쉽지 않은 요즘

어머니를 뵈러 남원에 들렀다가

잠시 광한루로 발길을 옮겼다.

 

인적이 뜸한 광한루원은

어릴적 모습 그대로인데 기둥마다 굵직한

세월의 주름이 도드라져 보였다.

 

 

 

지금의 광한루는 1170년(문종 24) 전중감(殿中監)

이었던 황공유(黃公有)가 무신의 난으로 벼슬을

버리고 남원으로 내려온 뒤, 그의 후손 황감평이

이곳에 일재(逸齋)라는 조그마한 서실(書室)을 지은

때부터 유래된다고 한다..

 

 

 

 

광한루의 시초는 조선 세종 원년(1419) 황공유의

아들인 황희(黃喜)가 한때 남원에 유배되었을 당시,

일재의 옛터에 광통루(廣通樓)라는 작은 누각을

지어 산수를 즐긴 것에서 비롯된다.

 

 

 

 

1444년(세종 26)에는 전라도관찰사 정인지(鄭麟趾)가

광통루의 아름다움을 월궁(月宮)에 비유하여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칭한 것에서 광한루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 : 광한루원 안내자료)

 

 

 

광한루 앞에는 요천강의 맑은 물을 끌어다가 

은하수를 상징하는 호수를 만들었다.

 

 

 

호수에는 지상의 낙원을 상징하는 연꽃을 심고

은하수에 가로막힌 견우성과 직녀성이 칠월칠석에

만난다는 오작교가 있다.

 

 

 

오작교에는 4개의 궁륭식 무지개 구멍이 있어

양쪽 호수의 물이 통하고 있다.

 

 

 

 

 

 

은하의 못 가운데 신선이 살고 있다는 전설의

삼신산을 상징하는 봉래(蓬萊)섬, 방장(方丈)섬,

영주(瀛洲)섬을 만들어, 봉래섬에는 백일홍을 심고

방장섬에는 녹죽(綠竹)을 심었는데,

영주섬에만 영주각을 건립하고

섬과 섬 사이에는 사다리꼴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완월정

 

 

 

 

 

 

후문 담장위의 배롱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