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짐'이라는 독특한 시어를 통해 세계의 모든
존재가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모습을 한 폭의 수묵화처럼 그려낸 시.
시 암송 ~~ " 일흔 아홉번째 "
장석남 님의 " 수묵정원 9 - 번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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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 정원 9-번짐 / 장석남 (1965~ )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 번 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 느낌 한마디 ■
♤수묵의 농담과 여백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가
없다. 퍼져나가던 수묵이 그친 면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조금씩 희미해져가는 색과 화선지의 여백이
교감하면서 서로를 끌어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번짐이다.
번짐은 자신의 색을 고집하지 않고, 건너가야 할
대상과의 사이에 가로놓인 벽을 무너뜨리려고도
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향한 겸허한 그리움으로
자신의 고유한 색을 흐릿하게 지울 수 있을 때
번짐은 시작된다.
번짐, 번진다는 것이 이렇게 멋질 때가 있다.
먹물이 번져가며 수묵화를 완성하듯이, 이 시는
번짐을 모티프로 시상을 전개한다.
여기서 번짐은 관계들을 서로 스며들게 하고,
조화롭게 이어지게 한다.
목련꽃은 여름으로, 너는 내게로 나는 네게로,
꽃은 열매로, 여름은 가을로, 음악은 그림으로,
삶은 죽음으로 죽음은 삶으로, 저녁은 밤으로,
산기슭 오두막은 봄 나비 한 마리로 번진다.
이처럼 번짐을 통해 자연과 인간과 시간이 서로
연결되고, 순환되고, 변화되고, 확장된다.
번져야 사랑인 것처럼 사람들의 관계는 서로
물들며 동화되는 것이다. 너와 내가 따로가 아닌
우리로 번지듯이, 우리 정답게 물들면서 살자.
(남도일보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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