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강릉 여행> 오죽헌

전승기 2019. 6. 10. 16:51


강릉 오죽헌


2019. 6. 7.


위치 :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 3139번길 24 (죽헌동)



강릉 여행 이튿날...

어제 저녁부터 내린 비 덕분에 더위는 가시고

걷기 좋을 만큼 이슬비가 내린다.


오늘은 조선시대에 무실역행을 강조하여 실학사상의

정신적 바탕을 중심으로 인간성의 평등과 인격의

존엄을 중시한 사상가...

율곡 이이가 태어난 오죽헌을 찾았다.






견득사의(見得思義)--- 공자

이득이 생기면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라.

- 나에게 이득이 있을 일을 만나면 먼저 옳은 일인가를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말이다.



이이(李珥, 1537. 1. 7 ~ 1584. 2. 27)


강원도 강릉 출생.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아버지는 증좌찬성 이원수(李元秀)이며,

어머니는 현모양처의 사표로 추앙받는 사임당신씨(師任堂申氏)이다.


아명을 현룡(見龍)이라 했는데, 어머니 사임당이

그를 낳던 날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 들어와

서리는 꿈을 꾸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 산실(産室)은 몽룡실(夢龍室)이라 하여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율곡은 8세 때에 파주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에

올라 시를 지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 났다.


1548년(명종 3) 13세 때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다.

1551년 16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례하고 3년간 시묘(侍墓)하였다.


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1555년 20세 때 하산해 다시 유학에 전심하였다.


1557년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다.


1558년 봄 예안(禮安)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했고, 그 해 겨울의 별시(문과 초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였다.

전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1561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경내에는 오죽헌을 비롯하여 문성사(文成祠), 사랑채,

어제각(御製閣), 율곡기념관, 강릉시립박물관 등이 있다. ,





<신사임당>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를 유지하던

조선 사회에서 여성들은 자기정체성을 잃고

남성의 보조적인 존재로 살아가야 했다.

그나마 사람 대접을 받았던 반가의 여성들도

문밖 출입이 제한되었고 이름 대신 성씨나

당호로 불렸으며, 평생 출산과 양육, 가사

노동에 시달렸다.


교육은 언문이나 깨치게 하는 수준이었고,

좀 나아가면 천자문, 소학 등을 통해 기초적인

한자를 습득하는 정도였다

 

이렇듯 조선은 철저한 남성 중심의 사회였지만

간혹 주머니 속에 송곳처럼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

같은 몇몇 여성들이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존재감을 드러냈다.

 

신사임당은 끊임없는 자기계발을 통해 이룩한 예술적

성취 외에도 남편에 대한 적극적인 내조, 올곧은 자녀

교육을 통하여 진보적인 자신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드러낸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는 조선 시대를 통틀어 유교적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현모양처(賢母良妻)>의 표상으로 알려졌고,

오늘날까지도 자애롭고 현숙한 어머니의 이미지만

게 부각되어 있다.






유명인들의 손도장을 새겨 놓았다.






율곡 이이는 <만언 봉사> 라는 정치 개혁 7개조를

제시하여 임진왜란 전에 <10만양병> 을 주장하였다.

대동법과 사창제 등을 제의하여 사회정책에 이바지 하였다.


그는 도량이 넓었으며 학문에서 해석보다는 근본적

원리를 종합적으로 통찰하였으며 퇴계 이황의

이기이원론에 대하여 <기발이승일도설> 을

근본사상으로 하였다.


율곡은 퇴계와 함께 조선 유학계의 쌍벽을 이루는

학자로 기호학파를 형성했다.

저서에는 <성학집요>, <격몽요결>, <소학집주개본>,

<동호문답>, <율곡전서> 등이 있다.





율곡은 위대한 철학에서 시작해 정치, 경제,

사회 교육의 사상가이며 경세가요 애국자이다.

그는 교육의 지상주의를 부르짖은 교육가요

저술가로써, 민본 덕치의 왕도정치 실현을 위해

시의(時宜)에 맞는 개혁을 주창하였다.

 

또한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강조하였고 보국안민을 위한 민족주체의식 함양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율곡은 무실역행을 강조하여 실학사상의 정신적

바탕을 중심으로 인간성의 평등과 인격의 존엄을

중시하기도 한 사상가이다.






<보물 제165호>

율곡(栗谷)이이(李珥, 1536∼1584)가 태어난

몽룡실(夢龍室)이 있는 별당 건물로,

우리나라 주택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이다.

검은 대나무가 집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서

<오죽헌(烏竹軒)>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오죽헌>은 조선 초기의 건축물로,

건축사적인 면에서 중요성을 인정받아

1963년 보물 제165호로 지정됐다.

이 곳 몽룡실(夢龍室)에서 율곡 이이(李珥)가 태어났다고 한다.

우리나라 주택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라고 한다.





<문성사 (文成祠)>

이이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썼다고 한다.









<백일홍>

이 배롱나무는 고사한 원줄기에서 돋아난

새싹이 자란 것으로 나이를 합치면 600여년이

넘는다고 한다.





검은 대나무가 집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서

<오죽헌(烏竹軒)>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사랑채 사립문





<오죽헌 사랑채>

기둥의 주련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썼다고 한다.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이 네 가지는 몸을 닦는 요점이다.


율곡선생의 <격몽요결> 중에서





사람을 상대하는 데는 마땅히

화평하고 공경하기를 힘써야 하며

친구를 사귀는 데는 반드시

학문을 좋아하고 착한 일을 좋아하는

사람을 골라서 사귀어야 한다.

율곡선생의 <격몽요결> 중에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학문을 하지 않으면 마음이 막히고

소견이 어두워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없다.

학문에 임하는 사람은 누구나 뜻을 세워

자기도 성인이 되리라는 마음으로

서두르지 말고 쉬지도 말며

꾸준히 정진할 것이니라.


율곡선생의 <격몽요결> 중에서









<어제각 (御製閣)>

율곡의 저서 격몽요결과 율곡이 유년기에 사용 하였던

벼루(용연)를 보관하기 위한 유품 소장각이다.